과학은 인류의 지식 체계 중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과학이 객관성과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과학이 실제로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지에 대해서는 깊은 철학적 논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 과학철학에서 바라보는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의 의미, 그것의 한계와 도전 과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과학적 객관성: 의미와 이상
과학적 객관성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객관성은 "개인의 주관적 편향이나 선호로부터 독립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과학에서의 객관성은 다음과 같은 측면을 포함합니다:
첫째, 가치중립성(value-neutrality)입니다. 과학적 사실과 이론은 연구자의 개인적 가치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물질의 독성에 대한 연구 결과는 연구자가 그 물질을 생산하는 회사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입니다. 과학적 주장은 다른 연구자들이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과학자가 특정 조건에서 관찰한 현상은 같은 조건에서 다른 과학자도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방법론적 객관성입니다. 과학은 체계적이고 엄격한 방법론을 통해 주관적 편향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중맹검법(double-blind method)과 같은 연구 설계는 연구자와 참가자 모두의 기대 효과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2. 과학적 합리성: 논리와 증거
과학적 합리성은 과학적 믿음과 이론이 논리적으로 일관되고 경험적 증거에 의해 지지되는 방식으로 형성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측면을 포함합니다:
첫째, 논리적 일관성입니다. 과학 이론은 내부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하며, 기존에 확립된 지식과도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기존 이론과의 불일치가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논리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둘째, 증거 기반 추론입니다. 과학적 주장은 관찰, 실험, 측정 등을 통해 수집된 증거에 기초해야 합니다. 증거가 부족하거나 없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셋째, 설명력과 예측력입니다. 좋은 과학 이론은 현상을 잘 설명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상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수성의 근일점 이동을 정확히 예측한 것은 그 이론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3. 현대 과학철학의 주요 논쟁점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은 20세기 중반부터 다양한 철학적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도전들은 과학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 과학의 혁명적 구조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이 단순히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패러다임(지배적인 이론과 방법론의 체계) 내에서 일하며, 이 패러다임은 그들이 무엇을 관찰하고 어떻게 해석할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과학적 관찰이 이론-의존적(theory-laden)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순수하게 객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며, 모든 관찰은 이미 특정 이론적 틀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의 절대적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파이어아벤트의 방법론적 무정부주의
폴 파이어아벤트는 더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방법에 대항하여(Against Method)"에서 과학의 발전에 단일한 합리적 방법론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과학적 발견들은 종종 당시의 방법론적 규칙을 위반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를 위해서는 오히려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goes)"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도전하는 관점입니다.
사회구성주의와 과학지식사회학
과학지식사회학(SSK) 또는 사회구성주의 관점에서는 과학 지식이 순수한 자연의 발견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봅니다. 과학적 사실과 이론은 실험실에서의 협상, 과학 공동체 내의 권력 관계, 더 넓은 사회적・문화적 맥락 등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연구가 중요한지, 어떤 증거가 신뢰할 만한지, 어떤 방법론이 적절한지에 대한 판단은 순수하게 객관적인 기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과학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는 시각입니다.
4. 현대 과학의 도전 과제
현대 과학은 여러 측면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의 이상을 추구하는 데 실질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복제 위기와 출판 편향
최근 심리학, 의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복제 위기(replication crisis)가 불거졌습니다. 많은 연구 결과들이 후속 연구에서 재현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연구 방법론의 엄격성, 출판 과정의 편향, 통계적 분석의 오용 등 여러 요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출판 편향(publication bias)은 긍정적인 결과(가설을 지지하는)만 출판되고 부정적인 결과는 출판되지 않는 경향을 말합니다. 이는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이해 충돌과 연구 자금의 영향
현대 과학 연구는 종종 산업체, 정부, 비영리단체 등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습니다. 이로 인해 이해 충돌(conflict of interest)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연구의 설계, 수행, 결과 해석, 그리고 출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담배 회사가 지원한 연구에서 흡연의 위험성이 과소평가된다거나, 제약회사가 지원한 임상시험에서 긍정적인 결과만 강조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학의 정치화
기후변화, 백신, GMO 등의 주제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적 문제가 종종 정치적으로 분극화됩니다. 이는 과학적 증거의 해석과 수용에 편향을 가져올 수 있으며,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과학의 정치화는 때로 '과학 부정(science denial)'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확립된 과학적 합의를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유로 거부하는 현상입니다.
5. 객관성과 합리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
이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과학 공동체는 객관성과 합리성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방법론적 개선
사전 등록(preregistration)은 연구자가 데이터 수집 전에 연구 계획, 가설, 분석 방법을 공개적으로 등록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결과를 보고 난 후 가설을 조정하는 'HARKing'(Hypothesizing After Results are Known) 문제를 줄일 수 있습니다.
메타분석(meta-analysis)은 특정 주제에 관한 여러 연구 결과를 통계적으로 종합하는 방법으로, 개별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객관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열린 과학(Open Science) 운동
열린 과학은 연구 과정의 투명성과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여기에는 열린 접근(open access) 출판, 데이터 공유, 열린 동료 평가(open peer review)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접근은 연구의 검증 가능성을 높이고, 과학적 지식 생산 과정에 대한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객관성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과학 교육과 소통의 개선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과학 소통(science communication)과 교육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과학이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수정을 하는 과정이라는 점, 과학적 불확실성의 의미, 그리고 과학적 합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6. 결론 :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ideals)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실제 과학 활동은 인간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사회적・문화적 맥락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체계적인 방법론, 증거 기반 추론, 공개적 검증 과정을 통해 다른 지식 형태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강점은 자기 수정 능력에 있습니다. 즉,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하는 메커니즘이 과학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대 과학철학은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에 대한 순진한 이해를 넘어, 과학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가치를 옹호하는 더 정교한 관점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성취를 평가하고, 더 나은 과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